주부산일본국총영사관 서포터즈 7기 - 0편: 소년과 바다
이수현, 소년의 발자취
바다가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다. 항구도시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해운대 북극곰 수영대회에 참여할 정도로 소년 역시 바다를 사랑했다. 소년에게 바다는 자유롭고, 아무리 큰 감정이 부딪혀오더라도 품을 수 있을만큼 넓었다. 그래서일까? 어느새 청년이 된 소년은 조국과 이웃나라 사이에서 날카롭게 몰아치는 미움이라는 감정을 바다조차 품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소년은 양국의 가교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스스로 그토록 사랑하는 바다를 건너가 이국의 땅에 첫 발을 디뎠다.
소년은 이국의 땅에서도 여전히 최선을 다했다.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고, 마치 바다와도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며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했다. 바쁜 삶에 지치기도 했지만, 소년은 양국의 가교가 되겠다는 꿈을 여전히 잊지 않았고 주도적으로 인생을 개척해나갔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 없는 날이었다. 일이 많아져 조금 늦은 귀가를 하게 된 날, 소년은 언제나처럼 신오쿠보역으로 향했다. 들어오려던 열차를 바라보며 몸을 잠식하던 긴장을 풀려던 찰나, 소년은 취객이 선로에 추락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열차가 접근 중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기꺼이 몸을 던졌고, 끝까지 취객을 구하려하다 자신이 피우려하던 꿈의 끝을 보지 못한채 끝내 운명을 달리했다.
소년이 보여준 이타심은 양국이 공유할 수 있는 다리가 되었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천히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꿈을 키워가던 소년은 스스로 넓디 넓은 바다가 되어 양국 사이에 존재하던 미움을 품고 사랑을 실천하며 떠났다.
동향, 동심, 동경
나는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오며 자라왔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동향의 소년이 보여준 이타적인 행동이 확산(擴散)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들으며, 어느새 소년과 비슷한 행동방식을 갖게 됐다. 곤경에 처했으면 누구든 발벗고 나서 도우려고 했으며,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건강 문제와 재수 같은 인생의 풍파를 겪으며 어느새 소년의 이름은 내 안에서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소년의 삶은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는 행동원리 중 하나로 남아있었다. 그랬던 소년이 내 앞에서 다시 선명해진 것은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주부산일본국총영사관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정이 많으셨던 고등학교 일본어 선생님께서는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주부산일본국총영사관에서 열리는 일본가요대회, 고교생 일본어말하기대회, 고교생 일본퀴즈대회 등을 소개해주시곤 했다. 일본가요대회 참가는 고려했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고, 결국 이러한 행사들은 내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여러 풍파를 극복하고 대학생이 되어 잠깐 마음의 여유가 생긴 시기, 고등학교 때의 일본어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고 근황을 주고 받다가 의인 이수현 20주기 기념 독후감 공모전을 알게 되었다. 잊고 있었던 소년의 이름 석 자를 봤을 때, 그동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복잡한 감정이 들었고, 집필하고 있던 단편소설 원고를 잠깐 내려두고 소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억 속에 소년을 묻어둔 채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내가 부끄러웠던 탓일까? 소년의 전기를 읽으면서도, 소년이 남긴 흔적들과 기사를 찾아보면서도, 글을 써내려 갈 때도, 후한 평가에 금상이라는 큰 상을 받게 됐을 때도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의인 이수현 20주기 북토크쇼 & 추모음악회
상을 받은 날, 소년의 가족을 만나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께서는 소년이 태권도를 배우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몸을 방어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직접 행동으로 실천했던 올곧음을 회상하며 소년을 그리워했다. 의인 이수현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사람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여전히 그저 올곧고 떼묻지 않은 소년이었던 것이다. 비록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방일이 취소되었지만, 소년의 가족과 만나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들은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의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질문
건강 관리를 위해 휴학을 했지만, 여전히 바쁜 삶을 이어가던 나의 눈에 주부산일본국영사관 서포터즈를 모집한다는 홍보 게시물이 들어왔다. 의인 이수현 20주기 기념 독후감 공모전에 참여한 후, 주부산일본국총영사관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추후 실력을 길러 일본국제만화상에 나가볼까 고민도 했던 시점이었다.
COVID-19 팬데믹으로 방일이 취소되는 바람에 마침 응모자격이 되었고, 가슴 한 켠에 늘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을만한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지원서류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또다시 행운이 따랐는지, 아니면 서포터즈로 기여할 수 있는 점을 어필한 것이 도움이 된건지 면접대상자로 선정되었고, 다시 초량역 인근의 주부산일본국총영사관에 발을 딛게 되었다. 초량역 출구 인근에 소녀상을 발견하여 잠시 멍하니 서있다 느낀 오묘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채 면접에 들어온 나에게 한 질문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면접자가 생각하는 가교(架橋)란 어떤 의미인가요?
질문을 받은 순간 숨이 막혔다. 여러 고민을 해오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내 안에 없었기 때문이다. 양국이 증오라는 감정을 다시 격화하고 있는 지금, 과거의 감정을 다음 세대에까지 대물림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대답을 했지만, 애써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회피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면접장을 나오면서도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서포터즈 면접에서 받은 질문
- 자기소개 해주세요. 한국어든 일본어든 둘 다 괜찮으며 평가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 서포터즈를 알게된 경로는 어떻게 되나요?
- UNIST에는 교환학생 제도가 잘 되어있는 것으로 아는데 해당 프로그램을 신청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UNIST는 신생 학교라 교환학생 MOU를 맺은 학교가 많이 없습니다… 흑… - 카드뉴스나 영상을 제작하실 줄 아시나요? 어떨 때 주로 제작하며 큰 호응을 받은 사례가 있으면 가르쳐주세요
- 총영사관에서 진행하는 행사에는 무엇이 있나요? 아는대로 말해주세요
- 총영사관에서 올린 카드뉴스는 무엇이 있나요? 기억나는대로 말해주세요
- 면접자가 생각하는 가교란 어떤 의미인가요?
- 주로 쓰는 SNS는 무엇인가요?
- 면접자에게 이수현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총영사관이 행사를 홍보할 때 개선해야할 점이 있으면 자유롭게 피드백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보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면접을 복기해보자면, 분위기는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주시는 면접관 한 분, 진지하시고 일본에서 오신 것처럼 보이는 면접관 두 분으로 총 세 분의 면접관이 계셨고 카드뉴스나 영상 제작 관련 활동이 이번 서포터즈 활동의 주테마로 보여 관련 능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전 기수에 서포터즈 활동을 하신 분들이 네이버 블로그에 면접 후기를 적어놓은 사례가 있었기에, 정리하여 한 번 읽어본게 면접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오히려 면접 과정에서 자기소개를 준비해왔는데 자기소개 질문이 없어서 아쉽다고 웃으며 이야기하자 면접관분께서 당황하시며 정말 질문을 안했는지 다른 면접관분들께 확인하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면접이 끝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종이를 받고 면접실에서 퇴실하게 되며 면접에는 보통 10분 - 15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처럼 보였다. 합격자 한정이기는 하지만 정부24를 이용하면 출입국사실증명서는 온라인 문서로 쉽게 받아 인쇄할 수 있다.
결과는 다행히도 합격이었다. 다른 업무를 하면서도 떨면서 문자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오가 지나도 문자가 오지 않아 초조했던 기억이 난다. 문자를 받고 나서야 겨우 긴장이 풀렸고 조금 쉬다가 정부24를 이용해 출입국사실증명서를 인쇄한 후 우체국을 통해 등기우편으로 부쳤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가교(架橋)란 무엇일까? 그리고 한일관계란 무엇이며 어떤 방향이 바람직할까? 우리나라는 분명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겪은 일제강점기라는 과거가 있다. 강제징용, 근로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여러 문제 역시 아직 깔끔히 해결되었다고 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진실을 찾고 해결방안을 같이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기보다는 서로의 증오와 슬픔 같은 감정이 앞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같은 감정을 물려주려고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 중 하나가 한국사였던만큼 일제강점기 시절의 역사를 공부할 때를 떠올려보면 결코 제국주의 열강이 득세하던 시절의 일본제국의 행동에 좋은 감정을 느끼기는 힘들다. 그러나, 나치 집권 시절의 독일제국과 지금의 독일이 전혀 다른 것처럼, 제국주의 열강 시절의 일본제국과 지금의 일본은 전혀 다르다고 봐야한다. 또한, 정치와 문화를 구분하지 않고 미디어 매체를 통해 얻게되는 역사 지식, 그리고 심지어 한국사 교과서조차도 부정적인 감정을 고양시키기 위해 왜곡되거나 의도적으로 서술을 빠진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
대표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조선인의 땅을 뺏었다는 내용이나, 일제강점기 때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축소하거나 잘 서술되어 있지 않는 사례가 있겠다. 실제로는 토지세를 걷는 것이 국가 입장에서 더 이득이었기에 신고 그대로 사정된 토지가 99.5%에 달했고,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선인이 2등 시민 취급을 받으며, 각종 설움을 당한 것은 맞지만 사회기반시설이 일제강점기 때 제대로 구축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명확히 하지만 ‘일본 제국 덕택에 조선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와 ‘일제강점기 때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라는 명제는 명백하게 다른 명제이다.
그러나 불리한 역사를 축소해서 다루는 문제는 일본도 자유롭지 않다. 731부대나 난징대학살 같은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도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소개하고 있지 않으며, 역사를 배우며 성장하는 학생들에게 완전무결한 선한 국가라는 것만을 어필하는 수단으로 역사 교과서를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잘못이나 실수하지 않고 성장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듯, 어느 나라나 숨기고 싶은 과거나 역사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배워야 하며, 후대에서 같은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보다도 한일관계가 더 얼어붙어있던 시절 이수현 의인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한다라는 인간으로써 행해야한다고 배우는 행동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안전과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한다라는 저울 위에서 이수현 의인과 같은 선택을 한다는 것은 초인적인 정신력과 이타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구나 영웅을 동경하고, 관계를 갈망하며, 동질감을 느끼길 원한다. 이수현이라는 바다에서 온 소년은 양국의 영웅이 되었고, 국민들은 동질감을 느꼈으며, 갈망해오던 관계는 물꼬를 틀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의 초창기 광고. 당시에는 면에 스프가 입혀진 상태로 유통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은 일본 묘조식품(明星)의 라면 제조 기술을 무상으로 원조 받아 제작됐다. 식량이 부족하고, 혼분식장려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에 인스턴트라면은 한국의 많은 사람들을 배고픔으로부터 해방했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식생활을 크게 바꿨으며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지금같은 혐오의 시대에 서로에 대한 오해와 증오만 쌓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언젠가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 선택을 강요받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통점을 찾고 협력해가다보면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날에조차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서포터즈 활동의 목표는 한일 양국 간의 동질감을 찾는 것, 그리고 피할 수 없고 반드시 마주해야하는 것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찾는 것이다. 과거를 똑바로 응시한 채로, 잘못이나 실수가 돌이 되어 날아와도 피하지 않고, 언젠가 상처가 양분이 되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언젠가 스스로 바다가 되어 사람들을 보듬었던 소년 앞에 섰을 때, 만족스러워할 대답을 전할 수 있도록.
[주부산일본국총영사관 서포터즈 7기] 울산과학기술원(UNIST) 김선욱
해당 게시글은 시리즈로 연재될 예정이며, 주부산일본국총영사관 서포터즈 7기로써의 활동 후기와 개인적인 솔직한 감상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춰 작성되었습니다.